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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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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입니다.
작성자 심기섭 등록일 09.08.19 조회수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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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조사반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중원 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위치하는 고구려시대의 석비로써 국보 205호에 지정되어있다. (고구려비의 높이는 203Cm이고 너비는 55Cm가량의 두툼한 돌기둥모양으로써 규모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뿐 만주 집안현에 위치하는 광개토비와 흡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1981년 3월 18일 국보로 지정이 되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해 중원고구려비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남한에서 유일한 고구려석비로 알려져 있어 그 존재자체로도 역사적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의 이름이 입석(立石)이 된 것은 중원고구려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남한강가 입석마을 어귀에 오래전부터 돌기둥이 세워져있었으나 마을사람그 누구도 그것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사람은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돌에다 백설기를 바치며 아들낳기를 기원했던 수호석이되기도 하였다가 또 어떤때는 빨래판으로까지 쓰였다고 한다.  이 돌기둥엔 두텁게 이끼가 껴 있었는데 그 드문 드문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은 낫끝등으로 쪼아보고 했지만 돌기둥에 새겨져 있는 문자를 읽어낼수가 없었다. 이 돌기둥으로 인해 이 마을은 아주 오랜옛날부터 입석마을로 불리게 되었으나 앞서 머리말에서 잠깐 언급했듯 돌기둥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1979년에 이었다. 발견당시 상당한 부분이 이끼로 뒤덮혀 있었고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내용과 글자수를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략 400여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 판독가능한 글자는 약230여자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230여자의 내용만으로도 이것이 고구려비임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충분하다.

  그 이유를 들자면, 비문의 첫머리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구절에서 바로 이것이 고구려비임을 알수가 있고 또 뒤이어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와 같은 고구려의 관등명만 나온점과 광개토왕비에 적힌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고구려비임을 알수가 있고, 그리고 신라토내(新羅土內)라는 명문이 두군데서 발견이 되는데 이는 신라이외의 나라가 신라를 일컬었던 것으로 고구려에서 신라땅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이외에 고구려에 의해 신라는 신라매금, 모인삼백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판독이 가능한 부분을 근거로 명문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면 비문의 앞부분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친선관계를 유지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두나라사이가 적대관계로 바뀌게 되면서 백제 개로왕(455~475)과 신라가 힘을 합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한강상류인 이 지역까지 세력을 넓힌 것은 장수왕(413~491)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391~413)때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했었고 뒤이어 장수왕때 남하정책을 단행하게 됨으로써 평양성을 비롯, 한강유역까지 그 세력을 미치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장수왕때 한강상류의 여러 성을 공략한 후 나라의 남방경계이자 장차 남방진출의 거점이 될 이 마을에 기념비를 세웠을 것이라 추정된다. 따라서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 중원고구려비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

  첫 번째로는 고구려비의 발견으로 삼국시대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한강이북지역까지만 진출했다고 알고 있었으나 비석이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므로 이의 발견으로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충주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려주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희소성의 가치이다. 우리나라에선 고구려의 유물발견이 아주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구려유물이나 금석은 손에 꼽을 정도 이므로 앞서 머리말에서도 언급했듯 고구려비는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한국 즉,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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